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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전통 기와

고구려 왕권에 따른 와당 변천

초기 왕권 형성기 와당의 지역성

고구려 왕권이 아직 지방 연맹체적 성격을 유지하던 시기, 와당은 통일된 국가 상징을 담기보다는 지역적 경제력과 기술력에 따라 다양한 유형이 병존했다. 이 단계의 와당은 기하학적 띠무늬·단순 연판문이 중심으로, 실용적 방수 기능을 우선한 형태가 많았다. 특히 점토의 정제 방식이 지역마다 달라 색조 차이가 두드러졌는데, 일부 북방 산지에서는 철분 함량이 높은 적갈색 와당이 주로 제작되었고, 동해안 지역에서는 미립질 점토가 풍부해 비교적 밝고 매끄러운 표면을 가진 와당이 생산되었다. 와당 제작도 개인 장인의 소규모 가마 중심이었기 때문에 규격이 일정하지 않고, 같은 건물에서도 문양 깊이·두께·색차가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이 존재했다. 이를 고고학에서는 ‘초기 고구려 다원형 생산체계’로 부르는데, 이는 중앙집권이 본격화되기 전 지역 가마들이 각자의 문양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는 중요한 증거다. 이때의 와당은 국가 상징보다는 지역 공동체의 신앙·의례·지리적 정체성을 반영하는 성격이 강했다.

 

 

고구려 왕권에 따른 와당 변천

 

광개토·장수왕 시대 왕권 확장기의 문양

고구려가 광개토왕·장수왕기에 접어들며 급격한 영토 확장을 이루자, 왕권은 단순한 주변 세력 통합 형태에서 중앙집권적 권위 구조로 발전했다. 이 시기에 와당 문양은 정치적 메시지를 담는 매체로 변모했고, 대형 건축물에는 권운·귀면·불꽃형 연판 등 강력한 상징을 가진 문양이 집중적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귀면와는 중국 남북조 문화의 영향을 받았지만, 고구려에서는 외래양식을 그대로 따른 것이 아니라 눈·코·입의 비율을 과장해 ‘기세를 내뿜는 표정’을 강조했다. 이는 외부 적을 제압하고 내부 결속을 다지려는 정치적 의도를 건축에 반영한 것이다. 또한 문양 깊이가 이전보다 두 배 가까이 깊어지면서 비바람에 의한 마모를 극적으로 줄였고, 이는 왕궁·성곽 등 고구려 국가시설이 북방 혹한에서 장기간 버티기 위한 전략적 기술이었다. 이 시기의 와당은 단순 미적 요소를 넘어 고구려 왕권의 팽창과 군사력의 상징으로 기능하면서, 문양의 서사성이 매우 강해진 것이 특징이다.

 

 

평양 천도 이후 중앙집권 강화와 와당의 규격화

평양 천도 이후 고구려는 행정체계를 정비하며 건축 재료의 표준화를 추진했다. 이 시기부터 와당은 국가 주도로 제작·관리되었으며, 왕궁·사찰·관청에 공급하기 위한 ‘왕실 직영 가마 조직(가칭 왕가요)’이 운영되었다. 중앙에서 문양 도안을 먼저 정하고 지방 가마는 그 도안을 따라 제작하는 방식이 도입되었는데, 이는 삼국 중 가장 빠른 와당 규격화 체계였다. 이때 사용된 점토는 여러 지역에서 운송한 원료를 섞어 일정한 수축률을 만드는 방식으로 가공되었고, 와당의 두께도 11~13mm 범위로 통일됐다. 흥미로운 점은 고구려 장인들이 건조 과정에서 점토의 뒤틀림을 막기 위해 와당 바닥에 일정한 모래 패턴을 깔았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본소성 전에 저온 예비 소성을 진행해 균열 발생률을 크게 낮추었는데, 이는 고구려가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안정된 와당 소성기술을 보유했다는 방증이다. 이는 단순한 기술 발달이 아니라 왕권이 건축을 통제함으로써 국가 질서를 시각화하려 했던 정책적 결과라 할 수 있다.

 

 

후기 고구려의 혼성 문양과 권위 약화의 반영

고구려 후기에 접어들며 왕권은 내부 귀족 세력의 대립, 경제적 부담, 외침 등으로 점차 약화됐다. 이러한 정치적 변화는 와당의 제작체계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우선 표준 문양 체계가 유지되지 못하고 지방 가마가 다시 독자적 문양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지역 산지의 토질을 반영한 색차·거친 표면으로 재출현했다. 문양의 선각 깊이는 초기·중기보다 얕아지고, 연판이나 귀면 도상의 윤곽도 단순화되었다. 특히 후기로 갈수록 와당 크기가 지역별로 다시 달라지는데, 이는 중앙 공급망이 붕괴하여 지방 장인들이 독자적인 규격으로 생산했음을 시사한다. 또한 전쟁기에는 와당을 재활용하거나 깨진 와당을 보수해 사용하는 사례도 나타났으며, 이는 왕궁 주변에서도 발견된다. 이러한 변화는 고구려의 권위 체계가 흔들리던 후반기 사회 상황을 반영하는 건축적 징후라 할 수 있다. 즉 와당의 혼성화와 규격 파편화는 단순한 미적 후퇴가 아니라 고구려 정치체제의 분열을 상징하는 증거다.